고향세탁
노무현 전남 강진 출신 5살 봉화 이주
사실 빨치산 명문가 출신 노무현에게도
5.18광주폭동 유공자 자격이 있었다.
빨갱이들과 폭도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고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 1980년 5월 광주에서
처음 있었던 것이 아니라, 1950년 6.25 전쟁 때도 있었다.
그때 노무현의 애비 노판석은 북한군을 위하여
싸우며 군경을 공격하는 빨치산이었고,
노무현의 장인 권오석도 죽창으로 양민 학살을 한
남로당 당원이었으니 노무현은 빨치산 명문가 출신이었던 것이다.
노무현은 전남 강진 출신이요,
노무현의 애비 노판석과 더불어 전남 강진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사람의 아들 윤한봉이 바로
5.18기념재단 설립자의 광주무장반란을 조직한 인물이었다.
노무현이 5.18 사기꾼들과 한편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노무현의 부친 노판석은
6.25 당시 인민군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노무현의 고향은 전라남도 강진,
1953년 노무현이 5살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약 20~30명 가량의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했다고 전해온다.
노판석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다.
노판석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가
철천지 원수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무현은 좌익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 하려 할때도 못 본체 했다.
노판석은 왜 빨치산이 되었나?
노무현의 조부가 일제시대때 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해방이 되자 동네 주민들로부터
엄청난 괄시와 무시를 당하게 됐다.
이에 대해 노판석은 동네 사람들에게 큰 앙심을 갖고 있다가
6.25가 터지고 나서 인민군이 전남 강진을 점령하자,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철저한 앙갚음을 하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다고 한다.
빨치산들에게 자발적으로 식량과 물품을 대줄
민간인들은 없었기 때문에 여느 빨치산처럼
노판석 역시 지리산에서 가까운 남원 부근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하지 않았겠나 하는 의혹이 있다 한다.
1953년 국군이 북한군을 격퇴하고 남한 전역에
치안과 질서를 확립해 나가자 노판석은 동네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밤중에
5살되던 노무현과 노건평을 데리고 목포항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고 야반도주를 했다.
동네 사람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배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족을 데리고 부산항에 도착한 노판석은
산골 오지인 경남 진영으로 도망을 간다.
그곳서 호적을 새로 만들었다.
당시에는 전란 직후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호적을 새로 만들기가 매우 쉬웠다.
그리곤 또 다시 김해로 도주를 했고,
이후부터 노무현 집안은 경상도 출신 행세를 해온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은 김해에서 역시 6.25 당시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하던 권오석의 딸과 결혼을 하게된다.
권오석은 6.25당시 인민군 앞잡이로서
지역주민 11명을 살해한 경력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 청렴 결백의 대명사" 그는 누구인가?
청렴 결백한 애국자 철저한 대통령 주변관리로
자신부터 부패에서 멀리 하였다
정치인들은 본받아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맏형 박동희는
동생이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구미면 상모리 의
초가를 지키며 농사를 지었다.
그는 “내 동생은 대통령이고, 나는 농부” 라며 근신하며 지냈다.
1965년 추석때 성묘왔던 박정희(朴正熙)가 호롱불 아래서
마주앉아 “전기를 넣어드리겠다 ”고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1965년 한국전력의 연차계획에 따라 자기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특혜시비가 일까봐 단호히 반대했다.
나중에 한국전력 사장이 직접 찾아가 설명을 하자
다른 집에 전기가 다 가설된 후에야 자기 집에 전기를 받아들였다.
둘째 누나 박재희는 어린 시절 박 대통령을 업어키우며
극진히 돌봐주었던 분이다.
고향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박재희씨는 동생이
대통령이 되자 서울로 이사를 와서 올케인 육영수 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육 여사는 이 편지를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이자
박 대통령 집안을 잘 알고있던 청와대의 비서관에게 전했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는 비밀로 한채 은행에서
대출을 알선해 주었다.
박재희씨의 아들은 그 돈으로 택시 3대를 구입하여
운수업을 시작했다.
김정렴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에 의하면
대통령의 친인척으로부터 부당한 융자나
다른 요청이 있을 경우 반드시 비서실장이나
경제수석 비서관에게 보고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다른 정보라인을 통해 알게된 박정희는
대노하여 조카에게 택시를 처분하도록 했고,
누님과 조카를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박재희 씨는 “대한민국 헌법에 거주의 자유가 있는데,
대통령 누나는 서울에 살 자격도 없는가” 하면서
항변했으나 단호히 쫓아버렸다.
이후 박재희 씨 집 주변에 경찰이 배치되어 청탁자의
출입을 감시했다.
박재희 씨는 우유 배달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대구사범 동기이며
청와대에서 친인척 관리를 담당하던 권상하 정보 비서관에게
박정희(朴正熙)의 친분을 거론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전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친가인 고령 박씨 일가, 외가인 수원 백씨 일가 및
처가인 육종관 씨 일가에 대한 집중 감시를 명령했다.
대통령 친인척의 경호 임무를 빙자한 비리 감시업무는
해당지역 경찰서 정보과에서 전담하게 되어
박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장인 육종관도 철저한 감시 대상 이었다.
이무렵 육종관 은 소실 한명과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매일 아침 형사가 집 앞에 나타났고,
외출할 때면 어김없이 뒤를 따라 다녔다.
참다 못한 육종관은 “내가 독립운동 할 것도 아닌데
왜 맨날 형사가 따라 붙는가.
사위가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해야 되는가” 하며 항변했다.
박정희(朴正熙)는 금융기관이나 조달청, 전매청에
“국회의원이나 권력기관에서 엉뚱한 부탁을 하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라.
보고하지 않으면 기관장을 문책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몇 몇 은행장으로부터 모 공화당 의원이 대출 청탁을
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박 대통령은 해당 의원에게
“일국의 국회의원으로서 지위를 이용하여 대출 청탁 등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친필 경고 서한을 보냈다.
당시 청와대 사정수석 비서관실에 근무했던 모 인사는
박 대통령이 권력의 핵심 부에 있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했다고 한다.
정보 비서실에서는 ‘요인동향보고’란 문건을
대통령에게 올렸는데,
주로 여권 핵심부 인사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했다는 식으로 마치 녹음한 것
같이 쓰여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사회통념에 벗어나는
이권 청탁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 친필로 경고 서신을 써서
사정비서실에 내려 보냈고,
자신이 그 서신을 해당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지도층 호화주택도 경고한 박정희(朴正熙),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에서 보고 받은 정보 중
직접 보관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비서실장도 참고하라면서 내주었다.
공무원, 국회의원 또는 재계 인사에 관한 정보 중 주의환기나
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경우
비서실장이 본인과 만나 확인하도록 했다.
또 호화주택이나 토지·임야 등 관계법규 위반의 경우
민정비서실에 현장 확인을 지시했다.
박정희(朴正熙)는 또 공직자나 재계 인사들이
분수에 맞지 않는 집에 살경우 정보비서실 직원에게
현장 사진을 찍어오도록 하여 직접 확인했다.
2~3차에 걸친 공직자 주택 일제 조사가 실시되고,
가끔 호화주택을 보유하고 있다는 세평을 듣는
재계인사의 집에 대한 현장 확인 소문이 알려지자
재계 인사들은 서둘러 호화 주택을 주한 외교관이나
서울 주재 외국 상사 주재원에게 빌려주었다.
박정희(朴正熙)는 재임 중 18년 동안 장관이나 공무원들에게
“경제 발전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주문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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