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청이윤(五請伊尹)
이윤을 다섯 번 청하다, 인재 영입에 정성을 다하다.
[다섯 오(二/2) 청할 청(言/8) 저 이(亻/4) 성 윤(尸/1)]
人事(인사)가 萬事(만사)라고 하듯이
크건 작건 일을 이루려면 도와주는 사람을
잘 발탁하고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귀중한 손님이 찾아오면 식사 때라도
열 번 일어나 맞이한 중국 夏(하)나라 禹王(우왕)의
一饋十起(일궤십기),
음식을 뱉고 감던 머리를 감싸 쥐고 나가 영접한
周公(주공)의 吐哺握髮(토포악발)은 윗사람이
인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말해준다.
그런데 벼슬에 뜻이 없어 초야에 묻혀 사는
인사의 초빙에는 諸葛亮(제갈량)이 살던 누옥을
세 번이나 찾아가 모신 蜀(촉)나라 劉備(유비)의
三顧草廬(삼고초려)를 대표적인 예로 든다.
이 유비보다 2000년 정도 앞의 商(상)나라 시조 湯王(탕왕)은
노예 출신의 현자를 모시기 위해 다섯 번이나 청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재상으로 나오는 伊尹(이윤)이
다섯 번 청한(五請) 주인공이다.
탕왕은 이윤이 지혜롭다는 소문을 듣고 초청했으나
이웃 부족 有莘氏(유신씨, 莘은 나라이름 신)의 방해로
번번이 좌절됐다.
그러다 귀족 딸과의 혼약을 맺고 남자 종
媵臣(잉신, 媵은 보낼 잉)으로 맞이하는데 성공했다.
이윤은 솥을 짊어졌다는 伊尹負鼎(이윤부정)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자신이 능한 요리에 빗대
탕왕에 천하의 정세를 설파했다.
이윤은 재상의 직책을 맡아 탕왕이 夏(하)의 폭군
桀王(걸왕)을 쫓아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윤은 간략하나마 여러 책에 등장하는데
출생과 업적에 대해서는 조금씩 다르다.
司馬遷(사마천)은 ‘史記(사기)’ 殷本紀(은본기)에서
이윤의 이름을 阿衡(아형)이라 하며,
탕왕을 만나려 자진해서 종이 되고 음식 맛으로 설득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달리 전하는 것이라며 소개한다.
‘이윤은 벼슬하지 않는 선비였는데 탕왕이 사람을 시켜
맞아들이려 했으나 다섯 번이나 거절한 뒤에야
탕에게 가서 따랐다
(伊尹處士 湯使人聘迎之 五反然後肯往從湯/
이윤처사 탕사인빙영지 오반연후긍왕종탕).’
이후 이윤은 옛 제왕과 아홉 명의 이상적 군주에 대해
이야기하며 보좌했고 탕 사후에도 바르게 이끌었다.
孟子(맹자)는 이윤을 4대 聖人(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일컬으며 미천한 신분에도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현명함을 높이 기렸다.
뛰어난 인재는 초야에 묻혀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도자의 안목과 열의에 따라 세 번이나,
다섯 번이나 간절히 청하면 자신의 재주를 발휘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고위 공직자 청문회를 볼 때마다
인재를 널리 살피지 않고, 자신의 진영에서만
사람을 구하려 하기 때문에 온 나라에 추문으로
칠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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