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진인 조은산의 문산군 일기
해피 띵호와
2023. 7. 1. 00:56
진인 조은산의 문산군 일기
기해년에 폐주 문산군(文山君)이 살아있는 권력도
수사하라고 대사헌 윤석열(尹錫悅)에게 전교하였으니,
우부승지 조국(曺國)과 그 일가의 비위를 적발해 사헌부 감찰을 하였다.
이에 그 외척들이 윤석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유시민(柳時敏), 김어준(金於俊) 등 유림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윤석열은 역적이라고 성토하였다.
이듬해 경자년엔 형조판서 추미애(秋美愛)가
사헌부 관원들과 결탁하여 윤석열을 탄핵했으니,
충신을 외면하는 문산군의 작태에 만백성이 분노하며 말하길,
오히려 윤석열이 더 임금감이라고 하였다."
- 윤조실록 제1권 -
"폐주 문산군(文山君)이 살아있는 권력도 수사하라고
대사헌 윤석열(尹錫悅)에게 전교하였으니,
우부승지 조국(曺國)과 그 일가의 비위를 적발해 감찰하였다.
이에 간신 유시민(柳時敏)과 외척 김어준(金於俊)이
상소를 올려 윤석열은 역적이라고 모함하였으며,
상왕 이해찬(李海瓚)이 형조판서 추미애(秋美愛)를 사주해
윤석열을 탄핵했으니 문산군이 덕망이 없어 빚어진 일이었다.
이에 윤석열이 종묘사직을 망치는 문산군을 폐하고자
재야 유림의 당수 이준석(李俊錫)과 함께 거병하였으니,
역병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만백성이 호응하였다."
- 윤조실록 -
경기관찰사 이재명(李在明)의 부인은 혜경궁 김씨(惠慶宮 金氏)였는데,
성품이 탐악하고 덕이 없어 경기감영 관원들의 원성을 샀다.
특히 몸종 배씨(裵氏)는 이재명이 성남현감으로 있을 때부터
김씨를 모신 관노였는데, 품계에 상관없이 관원들을 부렸으니
모두 김씨의 사가(私家) 잡일이었다.
심지어 관원의 녹봉으로 소고기 등을 사는 수법으로
감영의 공금을 횡령하기도 했으니 그 양이 장정 수십이
먹을 양이라 뒷말이 많았다.
결국 관원 하나가 이를 고발하였는데,
관찰사 이재명과 김씨 모두 관노 배씨의 탓을 했다."
- 문산군일기(文山君日記) -
광진군수 고민정(高旼廷)은 본디 경희향교의 분교에서
수학을 하던 자였으나, 벼슬에 출사할 무렵 본교 출신이라고
자칭하였다가 망신을 샀던 자다.
문산군(文山君)의 눈에 띄어 별다른 재주가 없음에도
출세가도를 밟았으니, 분에 맞지 않는 벼슬을 하여
얕은 학문과 실언들이 자주 구설에 올랐다.
한번은 같은 당파인 경기관찰사 이재명(李在明)의 선정을
칭송하기 위해 강아지들에게 연판장을 돌리려다가
당파 전체가 망신을 당했는데,
백성들 사이에선 고민정이 상대 당파에서
심은 첩자가 아니냐는 소문마저 돌았다."
- 문산군일기(文山君日記) -
심상정(沈相奵)은 남혐을 선동하는 패미(敗未) 강민진(姜珉辰),
장혜영(張惠英) 등과 통교하는 사문난적이다.
문산군 즉위 후 여가부(女家部)의 폐단이 극에 달했는데,
남정네들은 모두 잠재적 화간범이라고 매도하는 불온서적을
각 향교와 서당에 보급해 혹세무민을 일삼고,
윤미향(尹美香) 등 문산군의 외척들은 여가부의 공금을
자신들의 쌈짓돈마냥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상정 일파가 여가부의 강화를 주장했으니
백성들 모두 사문난적들이라고 욕했으며,
어떤 이들은 산신령을 자처하는 허경영(張惠英)이
더 임금감이라고 하였다."
- 문산군일기 -
문산군(文山君) 시기의 가장 큰 폐단은 바로 사문난적
패미(敗未)의 득세다.
여가부(女家部)를 중심으로 그 패악질이 극에 달했는데,
남정네들은 모두 잠재적 화간범이라는 패미 유림의
불온서적이 각 향교와 서당에 보급되어 혹세무민을 일삼고,
포도청에서 증좌도 없이 남정네를 화간범이라 단정하고
혹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또한 남정네들에게만 부과되는 군역을 조롱하고
그 보상조차도 반대하니, 도탄에 빠진 이대남(二對男)들이
봉기하여 윤조반정(尹祖反正)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문산군일기, 패미열전 편 -
문산군(文山君)은 나라에 홍복이 있으면 모두 과인의 덕이라며
경회루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으나, 나라에 화가 닥치면
처소인 강녕전에 들어가 몇날몇일을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부겸(金富謙), 호조판서 홍남기(洪楠基),
내의원 도제조 정은경(鄭銀敬) 등이 대신 화를 수습했으니,
임금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무능은 감춘채 성군의 모습만을
드러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사관은 논한다. 선왕 노종(盧宗)은 책임을 지는 임금이었으나,
문산군은 신하 뒤로 숨는 임금이니 어찌 문산군이 노종의
고명을 받들겠는가."
- 문산군일기(文山君日記) -
문산군(文山君)이 이르기를, 역적 윤석열(尹錫悅)이 스스로를
임금이라 참칭하더니, 금번엔 과인을 적폐로 지칭하고
혹세무민을 했다며 격노했다.
이에 상왕 이해찬(李海瓚)이 경기관찰사 이재명(李在明)을
도원수로 삼아 역적 윤가의 무리들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들을 모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오위의 군졸과 도성의 백성들 모두 호응하지 아니하였고,
호남에선 광주유수 송갑석(宋甲錫)이 역적 윤가의 호남 홀대론을
부정했다가 도리어 호남 백성들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장계가 올라오니 문산군이 아연실색했다."
- 문산군일기(文山君日記)